바로가기 메뉴
본문내용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서브메뉴 바로가기

고객센터

1688-9182

Home > 고객센터 > 여행후기

여행후기

제목 터키/그리스를 다녀와서(2006년 2월 6일에 쓰신 글입니다.)
작성자 대전노회 작성일 2008-03-10 16:02:42
8월 30일

. . . . . . . (비행로)

인천공항을 떠나 이스탄불에 도착, 다시 비행기로 아다나로 떠남, 아다나 공항 도착 호텔 투숙
 

8월 31일

. . . . . . . (화)

버스로 수리아 안디옥에 도착하여 베드로 동굴교회 순례,
다소로 이동하여 바울의 생가 및 우물터 순례, 갑바도기야 도착, 호텔 투숙

 

9월 1일(수)

갑바도기야의 괴뢰메 동굴 교회, 젤베 계곡, 데린구유도시(지하도시) 순례
이고니온으로 출발, 호텔 투숙

 

9월 2일(목)

비시디아안디옥, 라오디게아교회 순례, 파묵깔레로 이동 히에라볼리 유적지, 호텔 투숙(온천욕)
 

9월 3일(금)

빌라델비아교회, 사데교회, 두아디라교회, 버가모교회,
서머나(현 이즈밀/폴리갑기념교회), 이즈밀(서머나) 도착, 호텔 투숙

 

9월 4일(토)

에베소로 이동하여 사도요한기념교회, 아르테미스신전, 에베베소의 누가의 묘, 셀수스도서관, 원형극장, 마리아기념교회 순례, 쿠사다스항으로 이동,
호텔 투숙(당일 바람이 거세어 밧모섬 여행은 불가능)

 

. . . . . . . 9월 5일(일)

오후 5시에 채시매 항에서 출발하여 6시에 히오스 섬에 도착, 한국인 식당에서 처음 한식을 먹다. 히오스 섬에서 출발 배에서 1박을 하다.
 

9월 6일(월)

아테네 피레우스 항
 
 

9월 6일(월)

피레우스항 도착 후 고린도 이동
사도바울의 고대 고린도 유적지 - 상가터, 박물관, 아폴론 신전'
중식 후 아테네 이동 아레오바고 언덕, 파르테논 신전
수상 관저, 신타그마 광장, 근대올림픽 경기장,

 

9월 7일(화)

호텔 출발, 델피 이동, 델피 유적지 - 아폴론신전, 옴파로스
중식 후 메테오라 도착

 

9월 8일(수)

호텔 출발, 기암 절벽 위의 수도원 순례(메테오라)
현지식 후, 데살로니가이동, 성인 데메트리오스 기념교회
카발라 도착, 호텔 석식

 

9월 9일(목)

호텔 출발, 빌립보 루디아 기념교회, 세례터, 사도바울 감옥 순례,
그리스 국경 통과 - 이스탄불 향발, 호텔 석식

 

9월 10일(토)

호텔 조식 후, 이스탄불 시내 관광, 성소피아 사원, 톱까프 궁전,
블루 모스코, 히포드럼, 그랜드 바자르, 보스포러스 해협 등,
공항 이동하여 이스탄불 이륙, 인천 향발
 
 

성지 순례 기행문

촬영 : 노희석목사, 박삼섭목사

글 : 박웅식목사
 


 "도대체 가는 거야, 마는 거야?"

 3년 전 성지 순례 여행 의견이 제시되면서 줄기차게 제시되어 온 질문입니다. 그러나 성지 순례는 진행되었고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수 년 전부터 증경 노회장님들이 차근차근 준비해 준 덕분이며, 현 노회장님과 임원들이 그 열매를 잘 거두어 주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이 일을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필자는 이 순례여행기를 교회 사정상 떠나지 못한 분들에게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이 여행기로 다소간 위로가 된다면 참 좋겠습니다. 한편 잘못 오기  된 것이 발견되면 일러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아울러 좋은 미담과 추억거리가 있으면 사진과 기사를 본 기행문에 첨가하여 기쁨을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참여바랍니다. 

 

8월 30일 : 송촌교회에서 출발, 인천공항 출발 이스탄불 도착, 아다나 도착, 숨레이 쿠쿠로바 호텔 투숙
 


일행들은 송촌교회에 8시 30분에 모였다. 모두 기쁜 얼굴이다. 예배드린 후 출발하여 인천 공항에 도착하였다.

"우리 교회는? 우리 아이들은?"

비행기가 이륙할 순간 두고 온 교회, 자녀, 염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겼다. 터어키 비행기에 들어서는 순간 터어키 스튜어디스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왜 우리 비행기를 탔느냐는 표정이다. 꼴통이 잔뜩 난 것 같은 모습이다. 그들은 모두 30∼40대의 아줌마들이었다. 우리에게 마늘 냄새가 나서 그럴까? 우리 옆에다 터어키 향수를 뿌려댄다.

 

창공을 내려다보니 꽃 구름이 피어났고 곧 중국 땅이 보이더니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이 보이고, 옛 소련땅이던 우즈베키스탄의 설경이 눈에 들어온다. 가도 가도 해가지지 않는 것 같다. 비행기가 태양이 가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후 9시 15분에 이스탄불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아다나(터어키 남쪽 도시)로 가는 비행기를 다시 갈아타야 했다. 비행기로 11시간 덜던머리를 낸 일행들에겐 또 하나의 시련이었다. 새벽에 아다나에 도착하니 현지 한국 가이드 두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진수산이라 하였고 다른 사람은 임승빈이라 하는 한국인 가이드였다. 필자는 2호 차에 있었기 때문에 임승빈이라는 가이드의 안내를 받았다..


"이 곳에는 어딜 가든지 화장실과 음료는 유료입니다. 먼저 이 곳 돈으로 환전하시기 바랍니다."

가이드의 말이다. 공항 한쪽 구석에 위치한 환전소에서 돈을 바꾸었다. 직원의 손놀림이 '굼벵는 저리가라' 이다. 도무지 우리 관광객을 반기는 눈빛이 아니다.

가이드가 시키는 대로 몇 달러를 환전을 하니 우리 각자의 손에는 몇 천만원(화폐 단위는 티엘)의 거액을 거머지게 되었다. 몇 천만원! 갑자기 부자가 된 것 같다. 여기 저기서 기쁨의 함성이 터진다. 그러나 터어키에선 화장실 사용료가 25만원이란다. 복숭아 한 개가 200백만원이란 사실을 그 다음 날에서야 알게 되었다. 인플레가 심하여 어떤 해는 1,000%의 물가 상승이 있었다고 한다. 물가 상승의 요인은 1년에 한 차례 있는 30일간의 단식기간에서 유래 한다. 30일간의 기간에 수요와 공급의 차질이 생겨 물가가 뛴다. 새벽 1시경(?) 쿠쿠로바 호텔에서 여정을 풀었다.

11일 동안의 여행을 일일이 기억하여 정리하기란 간단하지 않다. 날짜 별로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노희석 목사님이 현장 촬영 사진을 정리하여 주었다. 감사드린다. 
 

 

8월 31일 : 수리아 안디옥으로 이동하여 베드로 동굴교회, 다소로 이동 다소의 바울의 생가, 우물터 순례, 갑바도기야 도착, 아바노스 호텔 투숙
 


새벽에 일어나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 늦게 잠을 잔 일행들은 아직도 졸리운 눈이다. 터어키 음식의 독특한 향료가 코를 찌른다. 음식을 전혀 손을 대지 못하는 사모님들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자칭 잡식성 소유자들은 그릇을 잘 비운다. 터어키에는 어느 식당에 가든지 테이블 위에 빵 소쿠리가 놓여 있다. 빵은 먹고 싶은 대로 먹는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빵으로 적당히 때우기도 한다. 빵이 있으면 항상 따라 나와야 할 것은 우유가 아닐까? 그러나 터어키 여행 중 우유를 먹었던 곳은 불과 1번 뿐이었다. 우유가 귀한가 보다. 여행 중 양과 염소는 많이 보았으나 젖소를 본 적이 없다.

현지 사람들은 '터어키'를 '트루크'라고 한다. 트르트족들이 살고 있는 것에서 유래한다. 트루크 족 40%가 터어키에 살고 60%가 " ∼ 스탄"이라고 불리우는 나라에 산다. 터어키는 UN의 준회원국이다. 준회원국이 된 것은 미국 덕분이다. 현재 NATO회원국으로서 유럽공동체에 가입을 원하지만 대체로 스위스의 반대로 가입을 못하고 있다. 스위스와 터어키의 관계는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보다 훨씬 골이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터어키는 1인당 3,500$, 10%의 실업율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돈은 20,000,000티아이다. 한국 돈 20,000원에 해당한다. 커피 한잔에 1,000,000티엘, 화장실 이용이 250,000티엘이다. 250,000티엘은 우리나라 돈으로 250원이다. 물에 석회가 많아 외국 사람은 물을 먹을 수 없다. 현지인들은 샘물을 먹는다. 웨이어가 "음료수 드시겠습니까?"라고 물을 때 "예스"하면 음료수 값을 내야 한다.

터어키 땅 가운데 3%가 유럽에 속하고 97%가 아시아에 속한다. 가장 큰 도시인 이스탄불이 동서로 나뉘어 동은 아시아이고 서는 유럽이다. 총 인구 7,300만명 가운데 이스탄불은 총 1,300명의 인구로서 상업도시, 관광도시이다. 유럽에서 이스탄불보다 많은 인구가 사는 도시가 없다. (수도는 앙카라)

터어키는 다른 이슬람 국가와는 달리 국교가 없다. 단지 전통적으로 이슬람을 믿고 있는데 국민 98%가 이슬람, 기타 2%이다. 이슬람국가답지 않게 종교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

4계절이 뚜렷하다. 밭은 많은데 집은 별로 없다. 사람들은 이웃과 항상 붙어서 집단 거주 한다. 700∼1,500m 안에 거주한다. 외로운 것을 참지 못하는 모양이다.

올리브유는 세계 4번째 생산국이다. 올리브유는 튀김용보다 드레싱으로 먹어야 좋다. 장에 좋다. 좋은 올리브는 푸른빛이 나는데 이것은 올리브를 따서 처음 짠 것이다. 처음 짠 것은 포장에 extra virgin이라고 씌어져 있다. 노란빛이 나는 것은 한 단계 아래의 품질이다.

올리브는 처음 짠 것은 제사장이 사용했고 두 번째 짠 것은 식용으로 사용되었다. 성경 '겟세마네'의 뜻이 '기름을 짜다'이다. 올리브 나무의 수명은 공식 기록이 없다. 겟세마네에 최고 2,000년 된 것이 있다. 올리브의 원산지는 이스라엘이다. 터어키에는 에게해 연안에서 가장 많이 재배한다. 터어키는 산림이 없다. 무분별한 벌목과 염소들이 작은 나무를 보는 대로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60년대 벌거벗은 산과 같다.

성경에서 동일한 지역을 시냇가, 골짜기 등을 표현하는 것을 본다. 기도론 시냇가, 기도론 골짜기 등 이것은 우기에는 시냇가이고 건기에는 골짜기가 된다.

지중해 쪽은 따뜻하고 흑해 쪽은 춥다. 밀 생산이 높아 빵이 고소하다. 항상 빵이 식탁에 오른다.

버스로 수리아 안디옥에 도착하였다. 버스에 내리니 아이들이 달려든다. 이름도 알 수 없는 꽃을 뜯어와 팔아달라고 조른다. 겨자나무 꽃이라고 일러준다. 이곳에 베드로 동굴 교회가 있다. 일행은 동굴 교회에 이르자 카메라들을 들이댄다. 역시 우리 나라사람들은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뽑아서 한번 보고는 잘 꺼내보지도 않는다. 필자는 이번 여행 중에 모두 9통의 사진을 찍었다. 어떻게 앨범을 정리할지 까마득하다. 아래 사진은 '베드로 동굴 교회'이다. 카톨릭교회에서 예배드리던 곳이라 한다. 수리아 안디옥교회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 인'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바나바와 사울이 함께 선교한 곳이다. 이방선교의 출발점이다.


베드로 동굴 기념교회를 출발하여 다소로 향하였다. 이곳 안디옥에서 다소까지 약 300km, 3-4시간은 족히 걸린다. 이곳에서의 여행은 기본이 3-4시간이란다. 터어키 국토는 우리 나라의 8배 크기이다. 아래 사진은 사도 바울의 생가가 있었던 안디옥의 우물터이다. 바울이 이 우물을 수차례 마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바울의 우물터 순례를 마치고 갑바도기야에 도착하여 아바노스 호텔에 투숙하였다


아바노스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갑바도기야 지방의 괴뢰매 동굴을 향하였다. 갑바도기야는 '말들의 좋은 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 말들이 서식하기에 좋은 곳은 아닌 것 같다. 이 지역은 화산지역이며 땅이 거의 석회석이디 때문이다.. 곳곳에 '파샤바'라고 하는 버섯계곡이 있다. 이 곳은 종교 박해를 피해 지하 교회로 사용되었다.

이 계곡은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조금씩 살던 지역인데 5세기에 이르러 수도원 운동이 시작되면서 수도사들이 살기 시작하였다. 바실리우스가 처음 이 곳에 들어와 수도생활을 시작하면서 뜻을 같이 하는 수도사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이 곳을 괴뢰매 수도원이라고 한다. '괴뢰매'는 숨어지내는 곳이란 뜻이다. 이런 곳에 굴을 파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4세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5세기에 수도원으로 사용되면 A.D. 7세기에 이슬람을 피해 살기도 하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살인자들의 도피처가 되기도 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이 안에 묻었다. 이런 괴뢰매가 갑바도기야 전역에 많다. 암스트롱이 이 곳에 와서 "내가 달나라에 같다올 필요가 없었군"하고 투덜거렸다고 한다. 이 곳에서 영화 '혹성 탈출'을 찍었다. 별천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사람들이 살기 불가능한 곳이다. 물이 없고 경작지(초원)가 없기 때문이다.

이 곳을 떠나 같은 갑바도기야 지방의 '데린 구유'(지하도시)를 순례하였다. 괴뢰매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지하도시도 괴뢰매와 마찬가지로 박해를 피해 지하로 피신한 장소이다. 어떤 농부가 닭을 키웠는데 이유 없이 닭이 없어지기 시작하였는데 닭을 찾아다니다가 이 지하도시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땅속에서 환기통을 통하여 숨을 쉬었으며 적군들에게 발각될 것을 염려하여 각 층마다 굴 막이가 있었다. 신학교가 제일 위 층에 있는 까닭은 적과 싸울 사람들은 청년들이었기 때문이다. 100평 규모의 예배처소도 있다. 노약자, 여자들은 안쪽에서 생활하였다. 지하에는 곡식 창고, 부엌, 식수가 저장되었다. 식수는 빗물이 타고 내려가 지하 6층까지 물이 채워졌다. 환풍 시설이 약하여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공간과 먹을 수 있는 공간이 엄격히 구분되었다. 입구가 작은 이유는 어두울 때 손잡고 쉽게 다닐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도시는 최고 깊이 90m에 이른다. 이 안에는 심지어 포도주 틀까지 있는데 사람이 위쪽에서 포도를 발로 밟아 즙이 아래 쪽으로 내려가 즙을 병에 담도록 되어있다. 포도를 맷돌에 갈지 않고 사람이 밟는 이유는 포도씨가 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씨가 깨어지면 포도주가 쓰다.

지하 도시에서 나와 이고니온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갑바도기야와 이고니온은 실크로드로서 중국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이고니온(꼬냐) 베이카라 호텔이 우리를 기다고 있었다. 이고니온은 사도 바울의 1차 전도여행지이다. 바울은 이 곳에서 말씀을 전파할 때 이고니온 사람들이 돌로 치려고 하였다. 바울은 그들을 피해 루스드라로 피신한다(행 14:1-6). 이고니온에서 바울의 음성을 듣는 것 같다. 이 곳에서 오늘의 여정을 풀었다. 


 

9월 2일 : 비시디아 안디옥교회, 라오디게아교회 등 순례후,

히에라볼리(파묵깔레)로 이동, 에니호텔에서 온천욕
 

오전 8시에 이고니온을 출발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비시다아 안디옥과 수리아 안디옥은 별개의 장소이다. 비시디아 안디옥까지 3-4시간 걸린다. 수리아 안디옥은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다. 이 곳에서의 여행은 기본이 3-4시간이다. 이고니온은 이슬람이 매우 강한 지역이다. 가는 길에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데 이슬람 사제의 동상(銅像)이 눈에 들어왔다. 뱅뱅도는 모습인데 사제는 저렇게 뱅뱅 돌며 어지러울 때 계시를 받는다고 한다. 저런 모양의 작은 인형상을 관광지 곳곳에서 팔고 있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하였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바울의 1차 전도여행지로서 위에서 말한 이고니온 보다 먼저 도착한 곳이다. 비시디아 안디옥에는 바울의 흔적이 남아있다. 오전 11시 30분에 비시디안 안디옥에 도착하였다. 예배드릴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안디옥은 로마시대에 매우 큰 도시였다. 지금은 옛 도시 흔적이 언덕에 남아있다. 곧 이어 라오디게아 교회에 도착하였다.

참고 내용 : 바울은 빌립보에서 자주장사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행 16:13)였는데 이유는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기 때문이었다.

"팔레스티나"는 로마 시대에 나온 말이다. 원래 가이사랴에 빌라도의 관저가 있었다. 그러나 빌라도가 유월절 때 이스라엘 관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임시로 갔을 때 예수를 심판하게 된다. 베들레헴, 베다니, 여기서 '베'는 '집'이란 뜻이다. 코란에는 구약 내용이 많이 나온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이상 세 종교는 600년 단위로 등장하였다.

세계 인구 중 13억이 이슬람교이다. 인도네시아는 1억 9000명 중 1억 7000명이 모슬림이다. 이슬람은 현재와 내세를 같이 본다. 우리 나라는 3,000명의 이슬람교도들이 있다. 6.25때 터어키 군인들이 처음 전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철수 하면서 끊어졌다가 중동 산업 때 이슬람 영향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터어키는 이슬람이 미세하게나마 퇴색하고 있다. 중동 지방에서는 터어키를 향하여 사이비 이슬람이라고 한다. 불상은 그리스 사람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불상은 서구적이다. 어깨에서 쳐진 옷자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알렉산더가 인도 간다라 지방까지 쳐들어 갔을 때 전해진 것이다.

알렉산더에 대한 일화는 많다.

알렉산더의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인데 그는 알렉산더에게 "네가 길을 가다가 그리스 사람을 만나면 부모, 형제처럼 대하고, 이방인을 만나면 개, 돼지처럼 대하라"고 하였다. 알렉산더는 신하들에게 "적들이 너희에게 잘하면 부모, 형제처럼 대하고 잘못하면 개, 돼지처럼 대하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방인들은 알렉산더의 군사들을 만나면 싸움을 포기하고 성문을 열어주었다.

알렉산더대왕은 피정복자의 제사장을 만났다. 알렉산더는 제사장 앞에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하였다. 신하들이 그 것을 못마땅히 생각하였다. 알렉산더는 "내가 제사장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절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교에 대하여 잠깐 경의를 표한 것 뿐이다."라고 하였다.

알렉산더 군사 4만과 바사 다리오 왕 3세의 군사 60만과 싸움이 붙었는데 알렉산더 대왕이 대승을 거두었다. 다리오는 도망하였고 다리오의 식솔들은 붙잡혔다. 식솔들이 붙잡히면 처형당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다리오 왕의 어머니에게 "부인이시여, 조금도 걱정 마소서"라고 안심시키고 극진히 대접하였다. 부인은 "당신이야 말로 우리를 다스릴 수 있는 제왕입니다."고 대답하였다.

대왕은 정복민들을 용병으로 쓰고 급여를 넉넉히 주었으며 그들을 이용하여 또 다른 정복을 하였다. 마침내 인도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왕의 부하가 더 이상 정복을 반대하자 왕은 겸허히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말하였다. "내가 정복할 땅이 이처럼 적더냐!" 왕은 그리스 사람들을 동방으로 이주시켰다. 왕은 후계자 없이 죽었다. 그가 죽을 즈음에 신하가 말하였다. "왕이시여, 어서 쾌유하셔야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쾌유하기 힘들면 빨리 후계자를 세우십시오"라는 뜻이다. 대왕은 말하였다. "나처럼 지혜로운 자가 이 제국을 다스릴 수 있다." 그리고 대왕은 숨을 거두었다. 옆에 있던 신하가 "왕께서 말씀하신 지혜로운 사람은 바로 나다"라고 말하였다. 같이 있던 몇몇 신하들이 각각 자기라고 말하였다. 왕이 죽자 그들의 부하들에 의하여 나라가 나뉘어 졌다. (사람들이 강의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30-40분이다.) 조금 쉬었다가 합니다.

문명 발생은 강이 있어야 한다. 아울러 날씨가 전조해야 한다. 아마존 강은 물은 있지만 날씨가 습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이집트는 돌판에 파키스탄은 흙판에 글씨를 새겼다. 오스만 제국이 다스린 때는 14세기부터 1923년까지이다.


그리스는 운동을 좋아하며 철학자가 많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로그인을 하셔야 작성이 가능합니다.